물려줄 수 없는 유산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기는 유산은 더 이상 단순히 토지, 건물, 예금과 같은 물리적인 자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유튜브에 영상을 업로드하며, 암호화폐를 거래하고 있다. 생전에 쌓아온 이러한 디지털 자산은 누군가에게는 부(富)의 상징이 되며, 또 누군가에게는 추억의 조각으로 남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 디지털 자산들이 사망 이후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법적 정의와 사회적 인식이 아직 불완전하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본인의 온라인 계정, 이메일, 클라우드 파일, 심지어 NFT와 같은 디지털 자산이 상속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이 글에서는 ‘디지털 유산’이 무엇을 의미하며, 현행 법률에서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그리고 사회가 이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디지털 유산의 개념 – 무엇이 디지털 유산인가?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이란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온라인 또는 디지털 환경에서 남긴 자산과 흔적을 말한다. 이 자산에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포함된다. 대표적인 디지털 유산의 예로는 이메일 계정, SNS 계정, 블로그 글, 디지털 사진 및 영상, 클라우드 저장 파일, 암호화폐, 온라인 쇼핑몰 계정, 디지털 화폐 지갑, 유료 앱 구매 내역, 디지털 게임 아이템, 구독 서비스 정보 등이 있다. 또한 최근에는 메타버스 내 자산이나 AI 음성 모델까지 디지털 유산 범주에 포함되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디지털 유산은 사용자의 사망 이후에도 일정 기간 온라인에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물리적인 재산과 달리 삭제되지 않고 플랫폼 서버에 남아 있거나, 일정한 로그인 없이도 외부 노출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자산들이 정확히 어떤 법률에 따라 누구에게 상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불명확한 상황이다. 디지털 유산은 아직도 법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회색 지대’에 존재한다는 점이 문제다.
법적 정의와 국내외 법률의 현주소
한국은 2025년 현재까지도 디지털 유산에 대한 포괄적인 법률 체계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민법상 상속의 개념은 '재산'을 중심으로 다루지만, 디지털 유산은 재산으로 인정되는 것과 아닌 것이 뒤섞여 있어 해석의 여지가 많다. 예를 들어,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는 명백히 경제적 가치가 있으므로 상속세 부과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개인의 이메일이나 SNS 계정은 실질적인 경제적 가치 산정이 어렵기 때문에 법적 처리가 불분명하다.
다만 몇몇 국가에서는 디지털 유산을 다루는 관련 법률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RUFADAA(Uniform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법은 상속인이 고인의 디지털 자산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GDPR의 일환으로 개인정보 주체가 사망했을 경우의 데이터 처리 기준에 대해 조항을 두고 있으나, 회원국마다 상이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본과 독일은 최근 SNS 계정에 대한 상속 가능 여부를 인정하는 판례를 내놓으며 사회적 논의가 확대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상속인이 사망자의 휴대폰 잠금 해제를 위해 법원에 ‘디지털 증거 보전 청구’를 신청하거나, 통신사에 계정 접근 요청을 하면서 사건이 법적 분쟁으로 비화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즉, 현재 국내 디지털 유산 관련 법제는 사후적, 개별적 대응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통합된 지침이 없는 상황이다.
사회적 인식 변화 – 죽음 이후의 디지털 흔적에 대한 관심
초기에는 사람들은 디지털 유산을 단지 ‘계정 삭제 문제’ 정도로 가볍게 여겼다. 하지만 최근 들어 SNS 계정, 유튜브 채널, 온라인 사진첩, 디지털 일기 등이 남겨진 가족들에게 정서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실제로 많은 유족들이 사망자의 계정을 ‘삭제’하기보다는 ‘기념’으로 남기기를 원하며, 이에 따라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은 추모 계정 전환 기능(Memorial Account)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디지털 유산의 상속은 단지 ‘정보 접근’의 문제가 아닌, 정체성과 기억의 연속성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남긴 블로그 글이나 영상 기록이 자녀에게 삶의 지침이 되거나, 감정적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점차 기업과 정부 기관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디지털 자산의 사후 처리에 대한 가이드라인 마련과 유언장 내 디지털 항목 추가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메타버스와 AI 기반 콘텐츠가 활성화되면서, 디지털 유산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고인의 디지털 존재 자체를 남기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AI 챗봇이나 보이스 모델을 통해 고인의 생전 말투와 지식을 복원하는 시도는 윤리적 논란과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영혼’ 개념을 만들고 있다.
앞으로의 방향 – 개인과 사회 모두의 준비가 필요하다
디지털 유산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죽은 이후 디지털 자산이 어떻게 될 것인지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디지털 유언장’이나 ‘자산 리스트’를 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비밀번호 관리자 앱을 통해 접근 권한을 사전에 넘기거나, 플랫폼 내 ‘사망 시 계정 처리’ 옵션을 설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회적으로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률 정비와 제도적 가이드라인 마련이 시급하다. 통합된 디지털 상속법이 없다면 남겨진 유족들은 정보 접근을 위해 매번 법원에 민원을 제기하거나, 플랫폼과 힘겨운 협상을 반복해야 한다. 플랫폼 기업들 또한 사용자 사망에 대비한 계정 관리 시스템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유산은 더 이상 특정 계층이나 IT 전문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누구나 디지털 흔적을 남기는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현대판 상속 문제’다. 우리는 이제 물리적 유산만큼이나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적·도덕적 책임감과 준비 자세를 가져야 할 때다.
'디지털 유산 상속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vs 미국의 디지털 유산 상속법 비교 (0) | 2025.06.27 |
---|---|
디지털 자산은 어디에 얼마나 있을까? (0) | 2025.06.27 |
물리적 유산과 디지털 유산, 상속 우선순위는? (0) | 2025.06.26 |
숨겨진 디지털 유산의 종류들 (0) | 2025.06.26 |
디지털 자산과 디지털 유산의 차이점 (0) | 2025.06.26 |